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토쿠 덴노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[[헤이케]] 정권을 세운 '''[[타이라노 키요모리]]'''의 외손자로 그의 둘째 딸인 [[타이라노 도쿠시|타이라노 도쿠코]]와 [[다카쿠라 덴노]] 사이에서 태어났다. [[1180년]], 다카쿠라 천황이 키요모리의 압박으로 [[태상황#s-3.3|상황]]이 되자 토키히토는 겨우 2세의 나이로 즉위했는데, 불과 1년 후인 1181년에 아버지 다카쿠라 상황과 외조부 키요모리가 1월과 3월, 즉 두 달 간격으로 동시에 사망하면서 천황으로서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는 정치적 기반과 군사적 방어막이 순식간에 통째로 날아가버렸고, 자신의 최대 지지기반이 되어줘야할 외척인 [[헤이케]]의 힘도 급격히 약화되었다. 이때를 틈타 헤이케로부터 권력을 탈환하고 [[인세이]] 통치를 실시하려는 [[고시라카와 천황|고시라카와 법황]]과 그와 동맹을 맺어 복수를 이루려는 [[미나모토]]씨([[카와치 겐지]])에 의해 [[역적]] 헤이케의 씨족으로 낙인찍혔고, 패주하는 헤이케 세력과 함께 서쪽으로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다. 이후 조부인 고시라카와 법황이 안토쿠 덴노와는 별개로 황족인 [[고토바 덴노|다카나리]]를 새로운 천황으로 추대하자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동시에 두 천황이 병립하는 상황이 벌어졌다. 결국 [[1185년]] [[단노우라 전투|단노우라 결전]]에서 헤이케가 패망할 때 외할머니인 니이노아마 및 어머니 타이라노 도쿠코[* 투신자살을 시도했으나 직후 구조됨.]와 함께 [[삼종신기|3종의 신기]]를 가지고 향년 6세의 어린 나이에 바다에 몸을 던져 자결하는 것으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. 흥미롭게도 약 100년 후, [[남송]]의 마지막 황제였던 [[소제(송)|소제]]도 안토쿠 덴노와 거의 같은 나이에 [[애산 전투|비슷한 상황에 놓여 똑같은 최후를 맞이]]했다. 이후 덴노의 시신과 바다에 빠진 [[삼종신기]] 중 신새와 거울은 되찾았지만, 검인 [[아마노무라쿠모노츠루기]]는 찾지 못했다. 이후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단노우라(오늘날 [[시모노세키]])에 능을 조성하고 그 영령을 배향하여 아카마 신궁(赤間神宮)을 창건했는데, 오늘날에도 [[간몬 해협]]의 제신으로서 숭앙되고 있다. 아카마 신궁은 [[조선통신사]]들이 [[혼슈]]에 이르러 숙박하고자 처음으로 방문하는 경유지기도 했다. 이 신사의 일을 기록한 조선통신사 중에는 [[이경직(1577)|이경직]]처럼 안토쿠 덴노를 따라 죽은 헤이케(평가)의 신하들을 충신이요, 미담이라고 칭찬하며, 조선의 기준에서 볼 때 야만인인 일본인도 이토록 자신의 주인을 위해 죽는데 [[임진왜란|난리로 인해 임금을 방치한 자들은 부끄럽지 않겠냐며]] 한 마디 한 경우도 있다.[* 《부상록》 8월 7일자 기사. 아이러니하게도 《부상록》이 기록된 1617년에서 채 20년도 되지 않아 이경직은 인조 곁에서 [[병자호란]]을 체험하게 되었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